잘 자고 일어났다. 이상하게 어릴 땐 안 그랬는데 요새는 아무리 침구가 편하다는 어느 호텔을 가도 숙면은 못하는 편이라, 두세시간이라도 잠들면 잘 잔걸로 친다. 여기선 그래도 5시간 정도는 잔 것 같다.
호텔을 일부러 신경써서 좀 괜찮은 곳으로 골랐던 이유가, 가을에 뉴욕여행을 잡아놔서 평소처럼 여름에 휴가를 못 쓰기 때문에 이렇게 짧게라도 호텔휴양을 좀 즐기고 싶어서였다. 결과적으로 이 날 홍콩 집회 때문에 어딜 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잘 한 선택이었다.
네스프레소 내려서 창가에 앉아서 모-닝 커피. 흔히 보는 침사추이쪽 스카이라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건 좋다. 저 쪽에 보이는 페리는 아마 이스트 홍함쪽으로 갔던 걸로 기억한다.
방에서 잠시 커피마시면서 정신차리고 수영장에 갔다. 그렇게 크진 않았지만 사람도 별로 없는 편이어서 누워 있기 좋았다. 한 가지 좀 안좋았던 건 내가 누워있던 쪽이 지붕이 있어서 유일하게 햇빛을 직접 받지 않는 곳이었는데, 아래쪽에 도시고속도로(?)에서 차들이 쌩쌩 달리는 소리가 다이렉트로 올라오는 위치라 굉장히 시끄러웠다.
내가 누워있던 쪽에서 바라본 수영장 전경. 파라솔 있는 곳 뒤쪽으로 출입구가 있다. 투숙객 카드키를 찍어야만 문이 열리는 구조이다. 썬베드도 보이는 게 전부. 반대편에 보이는 게 빅 온더 하버의 나머지 한 동 건물인데, 루프탑 바가 있지만 가보지는 않았다. 바다보면서 술마시는 것도 꽤 괜찮았을 텐데 귀차니즘이 이겼다.
여유롭게 지나가는 요트를 바라보며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수영장도 설렁설렁 돌면서 오전을 보냈다.
수영장이 위치한 층의 복도는 이렇게 생겼다. 웰니스. 수영장이랑 헬스장이 위치해 있다.
저 웰니스라고 쓰인 벽 반대쪽이던가 오른쪽이던가에 수영장으로 가는 문이 있다. 문 오른쪽 단말기에 룸키를 대야 문이 열린다.
문을 열고 나가면 보이는 모습. 내가 누워있던 지붕 있는 쪽이 오른쪽이다. 수질은 평범한 호텔 수영장 수준, 깊이도 성인 가슴높이로 특별할 것 없는 수영장. 따지자면 인피니티 풀인가?
방으로 돌아와서 VLT 아이스티 한잔 하고 또 멍때렸다. 수영하는 거 은근 기운빠진단 말이지. 어딜 갈까 하다가 일단 밥이라도 먹어야겠다 싶어서 나가보기로 했다. 딱히 계획도 없었고, 주말이라 시위 인파가 많다는 뉴스가 좀 들려서 고민을 좀 했는데 일단 이 근처는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출발했다.
내가 11층에 묵었구나.
복도가 어두컴컴. 실제로 이렇게까지 어둡진 않았는데 아이폰 6s 플러스의 한계인가.
약간 매콤한 거 먹고싶어서 슬렁슬렁 걸어온 리틀 칠리. 유명한 맛집은 절대 아니고 그냥 동네 사람들 가볍게 들러서 밥먹으러 오는 곳인 것 같다. 가게 앞에 보이는 검은 옷을 입은 분들은 아마도 집회 참가자. 이때까지는 그렇게 인파가 심하지는 않았다.
메뉴판. 동네 밥집인데 잉글리쉬 메뉴 있음. 동네 밥집이 아닌 걸지도??
줄기콩 볶음. 이건 정말.. 밥이고 술이고 무한대로 들어가게 하는 마법의 음식이다. 짭쪼름한 간에 센불로 확 볶아낸 채소가 맛이 없을 수가 없지.
흰 밥에 콩줄기볶음!
원래는 고추기름에 무친 오이를 시켰는데, 그게 안된다고 해서 취계를 대신 시켰다. 냉채에 칠리오일 들어갔으니까 대신 시킨 거 맞음. 그냥 맞음.
약간 덜 익어 보이긴 하는데 익긴 다 익은거다. 술향도 풀풀 나고 식감도 신기한 닭이지만 난 참 좋아한다. 이것도 밥이랑 먹으면 참 맛있다.
이렇게 해서 86 HKD. 밥은 공짜로 주는건가?!
밥을 잘 먹고, 이 동네에 유명한 로스터리가 있다고 해서 그쪽으로 가보려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길거리에 인파가 심상치 않더니, 육교에 올라가서 내려다 본 상황이 이랬다. 검은 옷을 입은 시위대의 모습.
질서정연하고 평화롭게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저 길을 걷고 있었을까.
나는 인파에 휩쓸려서 로스터리에 갔다가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문을 닫았다는 쪽지를 보고 발을 돌렸고, 조금 더 시내 쪽으로 들어가보면 어떨까 해서 시위대를 따라 노스포인트에서 포트리스힐까지 걸어갔다가, 속속 나타나는 경찰들과 인파로 꽉 찬 거리의 모습을 보고 호텔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 싶어 지하철 역으로 들어갔다. 시위대들은 노스포인트에서 시내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어서, 다시 걸어서 돌아가기는 불가능했다. 포트리스 힐 역에서도 노스포인트 역에서도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지하철에서 내려 역사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여유롭게 동네 구경이나 하려던 여행객의 안일한 생각이 잠시 부끄러워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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